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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프린트 (Post-Prints) 2021”을 기획하며

-굿바이 소외장르-

임영길 (기획, 한국현대판화가협회 회장)

   지난 2018년에 경기도미술관에서 한국 현대 판화 60년을 결산하며 대규모로 개최했던 ‘판화하다’ 전시와 올해에 개최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한 ‘판화, 판화, 판화’ 전의 기획에는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다. 그것은 판화를 분류하는 방식의 차이인데, 앞선 경기도미술관의 전시에서는 주로 생산자 입장인 ‘기법’ 위주로 나누었으나 작년의 전시에서는 수용자 시각인 ‘장소’로 바라본 것이다. 즉 판화에서의 ‘판(plate)’이 매개가 된 기법 위주에서 ‘판(field)’이라는 장(場)으로의 변화이다. 또한, 판화만의 순수한 영역에서 벗어나 플랫폼으로서 적극적으로 다른 장르와 관계를 맺으려고 한 점도 그 차이 중의 하나이다. 


   이렇게 새롭게 변화하는 현대미술의 지형에서 다시 새로운 60년을 모색해야 할 한국현대 판화는 한국현대판화가협회가 중심이 되어서, 외적으로는 포스트 디지털 매체 시대의 예술적 패러다임의 변화를 판화예술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하는 것과, 내적으로는 전통적인 의미의 판화의 고유성뿐만 아니라, 판화의 과정 전체를 세세하게 분해해서 다른 요소들과 결합시켜, 어떠한 융 복합이 가능한가를 타진하고, 재배치하는 실험적인 창작행위를 통하여, 전통적인 판화예술만의 고유한 아름다움을 유지하면서도 유연하고 다양한 새로운 판화매체의 개념을 재창안하여 판화예술이 현대미술의 흐름에 의미 있는 물줄기를 형성해야 한다.


   올해 우리 협회에서 공동주최한 제2회 강국진판화상의 수상자인 배남경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판화 내적인 배치를 극적으로 바꾸었다. 제판에 있어서는 목판을 볼록판화가 아닌 평판화와 연결시켰고, 프린팅에 있어서는 평판법인 석판화가 아니라 오목판화인 동판화의 프린팅 방법으로 찍었다. 이렇게 판화기법의 전통적인 배치를 뒤흔든 결과로 목판화기법으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던, 나뭇결이 결합된 서정적인 사진과 같은 이미지를 얻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판화 외적인 것과 융합해 새로운 결과를 얻은 성과도 있다. 예를 들어 김태호 작가는 색 층으로 이미지를 쌓아나가는 다색 판화의 표현기법을 이용해서 캔버스에 미리 바탕칠로 여러 색 층들을 두껍게 칠해 놓고, 목판화용 칼로 층의 색을 깎아 드러내는 기법을 사용해서 독특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이런 결과로 판화면서 동시에 회화인, 입체면서 동시에 평면인 독특한 효과를 얻고 있다. 또한 한국화가였던 김억은 자신의 한국화적인 시선으로 본 풍경화를 표현하기 위해 붓과 먹이 아닌 목판과 목판화용 칼을 사용하고 있다. 전통적인 한국화의 농담이 있는 이미지에서 인쇄용 투명 필름을 제작하는 방식인 2진법의 바이너리 색상으로 변환시켜, 이미지를 검은색 점과 흰색의 바탕으로 변환시킨 것이다. 이렇게 한국화에서의 먹이 번지는 바림 이미지의 명암 단계의 변화를 점 배열의 증감도로 변환시키는 비트맵 방식으로 바꾸는 목판화로의 재매개로 새로운 이미지를 생성시킨 것이다. 그의 최초의 원본이었던 한국화와 복제된 목판화 사이의 간극에는 뒤상의 인프라신 개념이 존재하고 그 간극들 때문에 이미지가 새로운 문맥에 도달한 것이다. 그가 의도했거나, 혹은 의도하지 않았던 간에 그의 목판화에 의해 파생된 비트맵 이미지는 20세기에 나타난 이미지의 증식과 파생에 관련된 복제 시스템의 방식과도 연관이 있다. 이러한 복제 시스템은 당시의 세계관적 변화의 징후를 나타냈다. 벤데이도트를 사용하는 팝아트 작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과 독일의 시그마 폴케는 이런 기법을 자신의 판화와 회화에서 중심으로 다루었다. 다만 김억 목판화의 점들은 인쇄를 위한 기계적인 점에서 수공에 의한 서정적인 점으로 대치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설치미술과 판화를 연결해서 실험을 하는 중국작가인 쉬빙은 대상과 정확한 유사성을 담보하는 일대일의 척도인 탁본 방식으로 만리장성의 돌 표면에 압력을 가해서 그 자국을 떠내고, 더 나아가 설치작가인 서도호는 자신이 살던 집의 내부 3차원 공간의 표면을 판화가 갖는 대상과 일대일의 척도로서 천으로 제작해 재현한다. 이 두 작가의 공통점은 대학에서 판화를 전공했거나 혹은 개인적으로 배웠다는 것이다. 또 다른 판화작가들은 영상이나 북아트와 연결해 설치로 나아가는 것을 실험한다. 이렇게 판화를 내적으로 세세히 분해해서 배치를 달리하거나, 혹은 다른 장르와 융 복합해 판화의 관점을 응용한 것들을 판화에 포함시킬 수 있어야만 판화 매체적인 경계를 더욱 넓히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마치 컴퓨터와 MP3, 그리고 무선전화기가 결합해 새로운 개념의 스마트폰이 탄생하고, 지금 새롭게 시작하는 4차 산업혁명이 여러 첨단 기술들을 융복합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있다는 것과 그 의미가 같다고 할 수 있다. 디지털 복제시대에는 판화의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인 복수원본 개념까지도 흔들리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판화에 있어서 복수성보다 판화의 관점, 혹은 태도를 중시하는 방향으로의 혁신적인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올해는 문체부에서 정한 소외장르로서의 판화가 선정되어 정부의 지원으로 판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몇 가지 행사를 가졌다. ‘판화, 판화, 판화’전도 그중의 하나였다. 불과 50년 전에는 밝은 미래 장르였던 판화가 왜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소외장르로까지 쇠퇴하게 됐는가? 하는 씁쓸한 물음에 우리는 답해야 한다. 판화는 다른 장르와 비교해 기법을 포함한 형식이 매우 정형화되었기 때문에 형식을 중시하는 모더니즘 예술에서는 그 형식적인 순수함을 잘 유지하면서 발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탈 모던의 시대에서는 오히려 형식적인 순수성에 발목을 잡히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야 한다. 20세기 중반에도 ‘미국의 액션페인터’라는 글에서 해럴드 로젠버그는 당시의 화가들이 미술의 기법 문제로 고민하지 않고, 화면이 행위가 이루어지는 무대로서의 하나의 사건이었다고 썼다. 예술작품의 형식상 특성보다는 창작행위가 훨씬 더 중요했다고 한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최근 들어 사진과 인쇄가 주 매체이던 시대에서 가상공간과 쌍방향성의 디지털 매체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다. 20세기 사진과 인쇄기술에 따른 시지각의 특성이 예술을 크게 변화시켰으나 새로운 디지털 매체의 시대에는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표현하는 사진의 덕목이 가상으로 변화된 세계를 기술하기 어려워져서 그 존재 근거가 희박해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판화예술의 창조적 특성을 연속선상으로 잇는 시도를 하는 것은 의미 있을 것이다. 판화는 전통적으로 언어로 된 세계를 육화시키는 ‘인카네이션’을 적극적으로 실현하던 매체였다. 해인사 장경각의 대장경 변상도 경판에서, 그리고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본과 관련된 종교적인 내용의 판화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최근에 새롭게 언어로 구성된 디지털 가상현실이 도래하였는데 이런 때에 판화의 전통적 역할이었던, 가상을 물질로 실현시켜 이미지의 재생산, 증식, 파생 및 복귀, 재출현의 주기를 거쳐서 무한한 생성을 엮어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다시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난 1970년대에 판화예술이 현대미술의 최전선에 서서 활발히 활동했던 것과 같이 판화매체가 현재의 소외장르에서 벗어나 다시 현대미술의 중심이 되기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가졌던 당시의 첨단 매체였던 목판화 기술과 같이, 묻혀있는 판화의 기본 정신을 발굴해 내고, 변화하는 시대의 예술 환경을 적극 포용하면서 작가 자신의 자유로운 표현에 도달해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법으로는 단단한 판화 형식의 껍질을 깨고 순수성에서 해방되어 다른 분야와 융 복합하고, UV 프린터나 3D 프린터와 같이 새롭게 등장하는 첨단매체를 받아들여 가상과 현실을 잇는 가교로서의 역할을 하며, 대중과도 적극적으로 소통하려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다. 또한 기존의 사물이나, 형식 등을 차용하는 포스트 프로덕션 개념을 받아들여 판화의 기본적인 면을 유지하면서도 동시에 다양하게 그 범위를 넓혀나가 매체 판화로서의 유연성을 발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시도를 위한 이번 전시에서는 다음과 같은 5가지 범주에서 작가들의 작품을 분석하면서 현재의 판화지형을 확인하는 동시에 새로운 ‘포스트 프린트’ 60년의 가능성을 타진해 나갈 것이다.

1. 초기 한국 현대 판화를 도입했던 모더니즘 계열의 작가들이 추구했던 정통적인 판화의 고유성 (Matrix of Prints)을 이 시점에서 다시 심층적으로 재확인하고 (안진국 평론)


2. 판화의 고유 형식을 넘어서 설치 및 입체, 퍼포먼스까지 넘나들며 실험적으로 추구하는 전위적인 형식판화의 아방가르드 (Avant-garde of Prints)적인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며 (이은주 평론)


3. 판화를 일반적인 시각조형예술처럼 공간을 다루는 것에서 벗어나 시간성을 도입하여 판화에 내재한 시간성(The Time of Prints)으로 판화예술을 새롭게 바라보는 것과 (이지현 평론)


4. 판화를 제작하는 과정에 개입되는 밑그림부터 제판상의 사건들(판목 및 깎여 나온 판목 쪼가리 등), 그리고 프린팅 과정의 잉크, 땀, 기름, 걸레 등과 같은 모든 물질적 요소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요소인 ‘냄새’, ‘소리’ 같은 것을 포함한 모든 것을 분해한 후, 이질적인 것들과 융합하고, 재배치하여 설치 개념의 창작 방식(Process and Reality of Prints)을 통해 새로운 판화의 가능성을 타진하고 (이시은 평론)


5. 최근의 현대미술의 창작 방식인 1990년대의 차용(appropriation art)을 넘어서 2000년대에 이르러 오픈 소스 운동에서 도래한 포스트 프로덕션 개념이 판화예술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Toward Post-Prints), 그 가능성을 타진할 것이다. (정연심 평론)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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